시장경제에 대한 구상은 그를 10년간이나 고립시켰던 문화대혁명으로부터 기인했다.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실패 후, 정권에 불안감을 느낀 마오쩌둥은 부인인 강청을 필두로 하는 사인방과 홍위병을 앞세워 정적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극좌 운동을 벌였다. 당시 참신한 정치 개혁 세력으로 떠오른 덩샤오핑은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을 잃고 유배지에서 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덩샤오핑의 아들은 홍위병 학우들에게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고문에 시달리다 창문에서 뛰어내려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게 된다. 문화대혁명 기간 수없이 많은 희생과 중국공산당의 후퇴에도 불구하고 그는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 중국의 운명을 시궁창에 빠뜨릴 뻔했던 문화혁명에 대해 덩샤오핑은 ‘나쁜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좋은 일’이라는 묘한 말을 남겼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던 그 사건을 두고 그는 ‘사람들의 사고를 촉진하고, 우리들의 단점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그의 낙천적인 성격이 잘 드러난 말이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정치에 복귀한 그는 1978년 5월경 주요 인재들을 서유럽 5개국으로 시찰 보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전에 자본주의 경제 연구를 철저히 하고 중국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준비한 것이다. 매우 치밀하게 사전 준비를 한 이유는 100년, 200년에 걸쳐 서구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발전했기 때문에 단기간에 중국이 시장경제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간도 인력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중국이 ‘다시 그릇된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노구를 이끌고 경제 강대국이자 자본주의의 꽃이 활짝 핀 미국, 일본 등을 방문했다. 정치적으로는 적국이지만, 시장경제를 알기 위해서 그 나라의 경제발전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몸으로 직접 느끼는 것이 중요했다. 일본에서 닛산 자동차의 기미쓰 공장을 견학한 후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곳의 노동 생산율은 중국 장춘 제 1 자동차회사의 수십 배에 이르는군. 이것이 바로 현대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