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아파서 며칠 째 드러누워 바깥 바람 안 쐰 지 한 동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조의 비밀편지라던가, 각종 이슈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뭔가 적을 기력이 나질 않았네요.
그리고 사실 말할 만큼 흥미가 동하지도 않았고요.

다만 이 만평을 보니 뭔가 할 말이 생기더군요.

출처 : 서울만평

저는 꽤나 오래전부터 성질나쁜 종갓집 22대손 고아 홀아비 주당 골초 인문학(주자학) 꼰대 정조설(설 씩이나)을 주장했는데, 사실 이런 주장은 제가 원조도 아닙니다.

대강 그렇지만, 언론에 띄워지고 사람들이 떠들기 시작하는 이슈는 학계에서는 다 쉬어서 팅팅 분 떡밥일 때가 많이 있지요. 그래서 이번 편지가 밝혀낸 중요한 사실은 정조의 성격이 나빴다 - 가 아니라, 심환지와 연계플레이를 했다는 겁니다. 성격 나쁜 건 웬만큼 역사 연구하는 젊은 사람들은 다 수긍하는 바 였고요.
정조 전문가이신 모 교수님도 식판을 앞에 놓고 정조가 얼마나 (성질나쁜) 보수주의자인데 실학의 선구자로 오해받고 있다- 라고 열변을 토하신 기억이 아직도 선합니다.
박현모 선생님도 정조의 리더십은 "닭치고 내 말 들어!"라는 거라는 말을 한 적도 있으셨고 정조실록을 보면 신하들 잡아 족쳐대는 솜씨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입니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습니다만. 하나의 이야기만 집어내자면 즉위한 직후 승진고과시험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썩어빠진 관리들인지라 알음알음 봐주기 봐주기로 넘어가는 판이었지요. 그런데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정조가 이 시험 결과에 문득 태클을 겁니다.

"아, 상위 3명 와서 내 앞에서 시험 봐라. 내가 문제 낼께."
"헉 임금님 그건 쩜... 아, 저기! 합격자가 몸 아프댑니다."
"...잡아와."


시험 출제자가 극력 반대하고 합격자가 도망가는 판국에, 정조는 합격자 세 마리를 공권력을 동원해 잡아온 뒤 시험을 치릅니다. 결과는 백지 3장. 긴장한 것도 있겠지만 원래 실력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정조는 분노한 용가리로 변신해서-

또 시험을 봅니다.

당연히 당사자는 싹싹 빌었고, 신하들이 차라리 벌 주고 끝내라, 라는 투로 구명하자 "이 딴 선비만도 못한 놈에게 처벌할 가치도 없다." 라는 답변을 했습니다. 딸깍발이로서 왕에게 이딴 소리 들으면 목 매달고 싶어질 걸요.
그래서 간신히 답안으로 시를 깨작깨작 적어내자, 이 시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하겠다는, 그러니까 널리 널리 퍼뜨리겠다는 포부를 밝힙니다. 당연히 잘 지은 시 일 리가 없지요.
...뭐 이후 그 부정합격자들은 실록에 다시는 안 나오니 뒷 일은 모릅니다만. 마음 약한 사람이라면 울거나, 자살하거나, 다시는 관직 안 나가고 싶어질 만큼 밟아댄 사건이었지요.

당시 정조는
꽃도 부끄러워할 24세(...)

그럼 이 인물이 차근차근 자라나 고집이 생기고 역정도 부리게 될 30, 40대에 이른 이후 성질머리는 더 대단해집니다.
보다못해 완소 채제공 할배가 적당히 따지라고 퉁 놓았지만 그래서 먹히지도 않고.

정약용이 간간히 적긴 했는데, 못 하는 술을 사발로 마셔야 했고 이거저거 고생도 했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사랑받는 군주였다는 것.
이렇게 갈궈대면서도, 열심히 하면 그 성과는 분명히 인정해주고 싸고 돌았거든요. 초계문신 싸고 돈 거야 유명하니까 재술할 필요 없고. 자기 사람을 지켜줄 때 그 성격 나쁨은 믿음직스럽게 됩니다.

"(내 귀염둥이를 까는) 그대의 말은 맞다. 헌데 이것은 모두 다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나의 숭고한 사업인 고로 시간도 오래 걸리니 태클은 자제 쩜?" 라고 가드를 올리고 좋은 말만 골라서 상대방을 엄청 까댑니다. 그 수준은... 비유컨데 이겁니다. 칭찬을 듣습니다. 계속 듣습니다. 그런데 느낌이 좀 이상합니다. 나중에 내용을 잘 보면 까는 겁니다. 너 이딴 것도 못 알아듣지, 라는 느낌으로.


재미있는 예를 좀 들고 싶은데 체력이 떨어지는 군요.
위의 일화들도 출처를 좀더 분명히 해야 하는데... 흥미 있으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나중에 첨부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편지의 발견을 '충격' 내지 '못 믿을 것'으로 받아들이는 걸 보면.
지금 이 편지를 보고도 사실이 아니야, 정조는 독살당했어- 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정조라는 인물에게 덮어씌워진 편견의 두께가 굉장히 강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정조라는 캐릭터가 그만큼 '성군'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어필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사극의 주인공은 착해빠진 애들로 감히 험한 말 한 번 입에 안 담고 나쁜 놈들에게 고이고이 당하면서도 힘들게 걷다가 독살이라는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될 일도 안 됐다 - 라는 비극의 클리셰를 따라야 하는 걸까요.
대장금도 그렇고 이산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보는 순간 민망하게 스리 착하고 착한 바보들. 저는 그게 오히려 비인간적으로 보이게 되는데 말이지요.

제가 성격 나쁜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1년 365일 왕의 옷을 차려입고 어허허 하고 인자하게 웃는 성군보다는, 일 끝나고 방에 들어가서 맨발에 속곳 차림으로 바닥에 구르며 "아 오늘 졸 피곤했다."라고 바다표범 흉내내는 왕이 더 좋습니다. 귀엽잖아요. (<-)


솔직히 세종만 해도 늘그막에 욕설을 퍼부어대기도 했고, 신하들이 "님 같은 성군한테 그런 말 들을 줄 몰랐삼!" "그래 나 나쁜 왕이다 어쩔래!" 라는 대화를 주고 받은 적도 있었고. (약간 왜곡있음)

언젠가는 황희가 삐지고 난장판 토론이 되어 재떨이 날아가도록 막장이 된 적도 있지요. 실록을 통해서 보는 저야 보기에 재미있었습니다만.

성군은 뭐든지 완벽해야 한다.
어쩌면 그게 인간성을 거세하는 건 아닐까요.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사람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나쁜 점도 있습니다. 좋은 점만 취하느라 나쁜 점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 건, 오히려 그 사람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거지요. 때로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역사를 보면서 사료를 보고 사실을 끌어내는 게 아니라,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상을 먼저 만든 다음 여기에 역사적인 사실을 두드려 맞추는 게 아닐까, 하고요.
저 스스로도 글 쓰면서도 그런 실수를 저지르는 게 아닐까 늘 걱정하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이런 일이 나에게 새긴다면, 실수를 선뜻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기운이 없군요.
머릿속도 뒤죽박죽입니다. 그럼 다시...

그런데 공부를 다시 하고 싶어지네요.
만약 역사 공부 모임이라도 발족한다면, 관심 있는 분들이 있으시려나...


출처: 이글루스 H모님

Posted by 권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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