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해방'' 진정 링컨대통령의 소망이었나?
'노예 해방' 진정 링컨대통령의 소망이었나? |
필자는 얼마전 몇몇 아는 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었다. 당시 누군가가 필자에게 "너는 미국의 대통령 중 누굴 가장 존경하니?"라는 질문을 했었고, 필자는 한국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애이브럼 링컨대통령을 단연 최고의 인물로 꼽아 줬더랬다. 필자의 답변을 들은 미국인들이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비췄고, "Why do you think so?"라는 질문을 보냈다. 필자는 당연히 '노예 해방'을 통해 인류사에서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는데, 필자의 의견을 듣고는 사실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에 대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인물이었다는 생전 처음 듣는 얘기를 그들을 통해 듣게 되었다. 아래 필자가 그들로부터 들었던 말과 나름대로 파악한 정보를 바탕으로 '링컨 대통령'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링컨 대통령에 대한 몇가지 인식을 나열해 보자면, 그는 좀 더 자세히 그에 대해서 알아보자. 애이브럼 링컨은 1809년 미국 캔터키 놀린 크맄의 산골마을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 농부인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일한 링컨은 평생동안 정식 학교 교육을 단 1년밖에 받지 못했으나, 주의회 하원의원을 거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다. 일리노이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링컨은 몇 차례의 실패 끝에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된다. 그뒤 다시 하원, 상원, 부통령 선거 등에서 실패했으나, 당시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번진 '노예제 이슈'를 타고 급격하게 정치적 논쟁의 중심인물로 부상한다. 결국 링컨은 1860년 11월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이듬해인 1861년 3월, 미국 제 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링컨은 취임을 전후해 노예제에 찬성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앨라배마,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플로리다, 조지아, 텍사스 등 남부 7개주가 연방에서 탈퇴해 이른바 '남부연합(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하는 총체적 국가 분열사태에 직면한다. 나중에 이 남부연합에는 아칸소,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4개주가 가담해 총 11개주가 된다.
'노예 해방'문제로 인해 발발한 전쟁이 바로 남북전쟁인데, 이 전쟁은 전쟁 종료 후 북군 사망자 36만명, 부상자 200만명 그리고 남군 사망자 25만명, 부상자 70만명이라는 엄청난 인명을 희생시켰다. 국토의 황폐화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북부의 인구가 2300만명, 남부의 인구가 900만명 정도(그 가운데 약 400만명이 흑인 노예였음)였으며, 당시의 전투 무기 수준이 21세기에 비해 대단히 낙후되 있던 점까지 감안한다면 그 피해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런 엄청난 피해를 감내하면서까지 링컨은 결국 무력을 통한 제국의 통합이라는 첫 번째 신화를 완성했던 것이다. 링컨은 원래 노예제 폐지론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폐지론을 주장했다라고 해석하는 게 더 정확한 것이리라. 아래 남북전쟁 당시 링컨대통령이 부하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이 투쟁에서 나의 최고의 목표는 연방(미국을 의미)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제도를 존속키시거나 파괴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약 모든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또한 일부를 해방시키고, 일부의 노예들을 남겨둠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링컨은 점차 노예해방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이끌려 간다. 또한 링컨이 노예해방을 결행하지 못한 내부적인 이유가 몇가지 있는데 그 첫째는 헌법상의 문제였다. 하루아침에 대통령령 같은 것으로 노예제를 폐지할 경우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대통령 취임선서를 어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노예해방을 강행할 경우 노예제를 인정하면서도 북부에 가담한 델라웨어, 미주리, 켄터키, 메릴랜드 4개주가 북부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링컨이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노예해방령을 발표했다는 것은 스스로도 인정한 바 있다. 왜냐하면 당시 남부연합은 인구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흑인노예들을 군수공장, 요새 및 진지 구축, 식량 생산 등에 군 노무자로 동원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링컨은 이 노예제의 토대를 흔들면 남부연합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실제로 처음 발표된 노예해방령도 이런 군사상의 필요에 초점을 맞춰 남부연합주에 소속된 지역에서만 노예를 해방하는 안으로 진행됐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오로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노예 해방을 하나의 전술로 활용한 것이라는 얘기다. 미국이라는 대제국의 국가적 분열사태를 막기위한 하나의 유효한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인권 수호자'니 '민주주의 실현의 아버지'니 하는 것들은 후세에서 아름답게 포장된 것들이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왜 미국인들이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을 링컨대통령보다 더 존경하는지 알게 됐다.(루즈벨트 대통령은 지난 십수년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뽑혀왔다.)
링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지 정확히 6일 만인 1865년 4월 15일, 남부를 지지하는 한 배우(존 부스)의 총격을 받고 암살됐다. 최초로 암살당한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제국을 휩쓴 갈등과 대립이 종식됐어도 그 여진은 무섭다는 사실을 세상에 각인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필자는 결코 링컨대통령의 업적을 폄훼하기 위해 이 칼럼을 작성한 게 아니다. 다만 야후싸이트에서 '링컨'을 치면 관련 사이트가 무려 '약 1910만개'가 뜨고, 아마존에서 링컨을 치면 무려 '4만4703권'의 관련 서적이 조회되는 것을 보면서, 애이브럼 링컨이 미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어찌됐거나 그는 결국 '노예 해방'이라는 인류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개인의 영달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갔기에 속세의 우리들이 존경해야할 위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겠기에 이 칼럼을 작성한 것이니 그냥 읽어보시기 바란다. |